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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하는 삶에서 고정 루틴은 가능한가?

by 하아ㅏ루 2025. 6. 11.

이 글은 ‘이동하는 삶’이라는 불안정한 조건 속에서 어떻게 루틴을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재해석하고 실천할 수 있는지를 탐색한다.

 

이동하는 삶에서 고정 루틴은 가능한가?
이동하는 삶에서 고정 루틴은 가능한가?

 

디지털 유목민이라는 개념은 한때 일부 특권적인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제는 점차 많은 사람들이 이 방식을 현실적인 삶의 형태로 받아들이고 있다. 인터넷만 연결되면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시대, 사무실 대신 노트북과 백팩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늘어나는 현실 속에서 ‘루틴’이라는 단어의 의미도 변하고 있다. 고정된 삶에서 루틴은 안정과 반복의 상징이었다. 정해진 출근 시간, 같은 자리에 앉아 업무를 시작하고 정해진 시간에 퇴근하는 구조 안에서 루틴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그러나 디지털 유목민은 다르다. 도시가 달라지고, 시차가 바뀌며, 환경은 매일 변한다. 그 변화 속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놀라운 집중력과 생산성을 유지한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바로 변화 속에서도 루틴을 재설계하고 유지하려는 의식적인 태도와 기술 덕분이다. 

 

"루틴은 고정된 장소에 묶여야만 가능한가?"


많은 이들이 루틴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특정한 장소와 시간을 떠올린다. 아침 햇살이 드는 창가 옆 책상, 매일 찾는 동네 카페, 규칙적인 헬스장 스케줄 등은 고정된 환경에서 루틴을 형성하는 대표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이동을 전제로 한 유목민적 삶에서는 이 고정성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숙소는 며칠마다 바뀌고, 익숙한 환경은 매번 새로워진다. 전날 머물렀던 도시와 오늘 도착한 도시는 기후, 언어, 리듬 모두 다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루틴’을 기존의 정의대로 유지하려는 시도는 번번이 좌절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루틴은 반드시 물리적인 고정 환경에서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루틴은 ‘내면의 구조화된 습관’으로 볼 수 있다. 고정된 장소가 없다면, 나만의 시간 흐름을 중심으로 루틴을 재정의하면 된다. 예컨대 매일 아침 눈을 뜨고 10분간 명상을 한다면, 그 명상은 호텔이든 공항이든 유지할 수 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오늘의 업무를 점검하는 시간, 하루를 마감하며 짧은 회고를 남기는 루틴도 장소에 관계없이 지속할 수 있다. 결국 루틴은 장소보다 ‘의식적 반복’에 의해 유지된다.

디지털 유목민 중에는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기보다는 ‘기능 중심 루틴’을 실천하는 이들도 많다. 예를 들어, ‘기상 후 1시간은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지 않기’, ‘집중 업무 전에는 반드시 산책하기’, ‘저녁 식사 후 30분간 독서하기’ 같은 방식이다. 이처럼 루틴을 시간이나 장소에 묶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행위의 반복’으로 해석할 때, 이동하는 삶 속에서도 루틴은 충분히 지속 가능하다.

 

"변화를 수용하면서 리듬을 지키는 기술"


이동하는 삶에서 루틴을 지키기 위해서는 단순히 ‘하던 걸 계속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기술이 필요하다. 그 기술은 바로 ‘유연한 고정성’이다. 이 말은 언뜻 모순처럼 보이지만, 디지털 유목민의 현실에서는 가장 현실적인 전략이다. 루틴을 정해진 시각이나 공간에 묶지 않고, 일정한 기능적 역할로 분류하여 그것을 유동적으로 재배치하는 방식이 핵심이다.

예를 들어, 한 도시에서는 아침 8시에 조용한 카페에서 집중 업무를 할 수 있었지만, 다른 도시에서는 오전에 카페가 붐비고 오후가 더 한적할 수 있다. 이 경우, ‘아침 업무 시간’이라는 루틴을 ‘집중 업무 시간’으로 유연하게 해석해 오후로 옮기는 것이다. 중요한 건 ‘집중의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지, 반드시 아침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루틴의 기능을 중심에 두고, 그 기능을 충족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그때그때 설정하는 것이 이동하는 삶에 맞는 루틴 설계 방식이다.

또한 ‘앵커 행동’이라는 개념도 유용하다. 앵커 행동이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고정 행동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는 ‘기상 후 명상’이 앵커일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점심 후 운동’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앵커 행동은 장소와 시차가 바뀌어도 가능한 습관이기 때문에, 그것을 중심으로 다른 일정을 배치하면 새로운 환경 속에서도 빠르게 안정감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잦은 이동으로 인한 예측 불가능성을 완화하기 위해, 일주일 단위의 루틴 플래닝도 유용하다. 매일 똑같은 루틴을 고집하기보다는, 매주 초에 도시의 조건을 점검하고 그에 맞게 주요 루틴을 배치하는 방식이다. 이처럼 루틴을 동적으로 설계하고 조정하는 능력은 유목민 삶에서 중요한 자기관리 기술이다.

 

"루틴은 삶의 정체성을 지키는 가장 조용한 방식"


끊임없는 이동과 변화 속에서 루틴은 단순한 생산성 도구가 아닌, 정체성을 지키는 방법으로 기능한다. 외부 조건이 계속 바뀌는 삶에서는 자칫하면 내가 누구인지, 왜 이 길을 걷고 있는지조차 잊기 쉬운 환경에 놓이게 된다. 루틴은 그런 상황 속에서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들어주는 구조물이 된다.

예를 들어, 아침마다 ‘세 줄 감사일기’를 쓰는 디지털 노마드가 있다. 그는 어느 도시를 가든 이 루틴을 유지하며, 그 안에서 자신의 감정과 생각, 하루의 의도를 정리한다. 이 사소한 습관은 ‘나라는 사람’을 구성하는 핵심이다. 또 다른 이는 어느 도시에서든 하루 한 끼는 직접 요리해서 먹는다. 단지 식사를 위한 행위가 아니라, ‘돌봄’이라는 가치를 루틴으로 구체화하는 방식이다. 이처럼 루틴은 ‘나를 위한 약속’이자, ‘내가 지향하는 삶의 방식’을 반복적으로 되새기게 해준다.

디지털 유목민의 삶은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자유로움이 있지만, 동시에 자기 경계가 쉽게 무너질 수 있는 환경이기도 하다. 일정한 루틴이 없다면 하루는 금세 흘러가고, 어느 순간 ‘나는 지금 어디쯤에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 막막해질 수 있다. 루틴은 그 속에서 방향성을 제공하고, 외부 세계의 빠른 변화에 휩쓸리지 않도록 나를 단단히 붙들어준다.

결국, 고정된 루틴은 단지 일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수단을 넘어선다. 그것은 나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한 일종의 고요한 저항이다. 도시가 바뀌고, 기후가 달라지고, 언어가 다르더라도, 내 안의 작은 반복들이 나를 나답게 만든다. 루틴은 여행자와 일꾼 사이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잡는 유목민에게 가장 필요한 정서적 닻이다.


‘이동하는 삶’은 불확실성과 자유, 모험과 외로움이 공존하는 방식이다. 그 속에서 루틴은 흔들리는 일상의 중심을 잡아주는 실질적인 전략이다. 고정된 루틴은 물리적 정착이 없는 삶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다만 그것은 기존의 ‘정해진 시각과 장소에 따른 패턴’이 아닌, ‘기능 중심의 유연한 구조’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반복되는 행동 속에 내면의 리듬을 담고, 작은 일관성을 통해 나를 지탱해가는 루틴은 디지털 유목민의 삶에서 가장 강력한 자산이다.

결국 이동하면서도 루틴을 유지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바뀌는 세상 속에서도 나의 중심을 잃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루틴은 흔들리는 삶 속에서도 내가 누구인지를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되묻는 도구이며, 삶의 본질적인 방향성을 확인하게 하는 나침반이다.